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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인으로서/일상_생각,정리,감사

374. [퇴사Essay] 나보다 나를 더 잘알았던 아버지

by Fidel / 밤바람 2026.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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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아버지 생각이 나는 아침이다.

지난 해 10월 23일 새벽, 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산소 포화도가 떨어지는 사인이 와서 가래를 뽑아내는 석션을 하는 사이,

아버지는 인상을 한번 꾹 쓰시더니, 더이상 호흡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본 그때 나는,

'고생 많으셨습니다. 편히 쉬세요'의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도 그럴듯이 아버지께서 너무 오랜 기간동안 누워계셨기 때문이다.

몸은 항상 좋지는 않으셨어도 머릿속은 엄청나게 많은 생각과 해야 할 일들로 꽉 채워진 아버지께서

거의 1년동안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아들로서 보고 있기가 참 민망하고 아쉽고 서운했다.

나의 아버지는 가시는 모습까지 항상 정정하고 성성했으면 했던 바램이었달까.

왜 한번도 안오시나.

그렇게 보내드린지 벌써 8개월.

아버지는 내 꿈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으셨다.

큰누나도 몇번 뵈었다 하고 얼마전부터는 어머니 꿈에도 보이신다는데,

나는 왜 안보이나..

병중에 섬망이 있으셨을때에도 내가 아버지에게 주식만 이야기 하면 그 눈이 다시 빠릿해 지시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시던 아버지 였다.

마흔 전엔 땅끝마을에서 농사를 지으셨고, 88년에 광주로 올라오신 후 부터는 주식투자자로 사셨던 아버지시지만

집에 투자를 하는 사람이 없고, 워낙에 누구와 어울리는걸 잘 하지는 않으셨던 분이라.

내가 주식투자를 시작하고 나서는 나와 종목 이야기를 하는 걸 그리 좋아하셨었다.

군대를 다녀오며, 한달 만원 남짓 하던 월급(당시 이등병은 9900원, 병장은 13300원이었다)을 모아 늦디 늦은 아버지 어머니의 신혼여행을 티켓을 내밀었던 그날,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봤고,

그 다음부터 집안의 대소사는 항상 나의 생각을 물어오셨던 아버지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버지의 "힘없는" 모습이 싫었다. 싫어도 너무 싫었다.

우리 아버지는 항상 나보다 똑똑하고, 목소리도 힘이 있고, 잘생긴 사람이어야 했다.

건강은 항상 좋지 않으셨지만, 해남도서관에서 다독상을 몇번이나 수상하실 만큼 책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모습까지 좋았기를 바랬던 내 이기심에

마지막에는 그 모습을 안보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그럴까. 아버지 입원하셨을때, 자주 찾아뵈지 못해서 그럴까.

지난 8개월동안 한번도 내 꿈에 찾아오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다.

꿈은 원래 휘발성이다.

뇌과학을 조금이나마 공부한 지금, 꿈이 잊혀지지 않고 계속 생각난다면, 내 머릿속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기억이 날 수 밖에 없는 꿈들이 있다.

아마 지금은 아버지에 관한게 그게 아닐까 싶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잘 몰랐는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아버지를 어제 꿈에서 만났다.

아니 만났다기 보다, 흔적이 있었다.

어제꿈에서 나는 학창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나가야 하는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고, 옷도 다 갈아입었는데, 거울을 보니 머리를 안감았더라.

급하게 베란다로 나가서 (화장실이 아닌 왜 베란다인지 잘 모르겠..) 머리를 감는데, 그 앞에 TV가 켜져 있었다.

'아이고, 우리 아부지 여기다가도 TV를 켜 두셨네'

아버지는 주식 투자를 하시면서 새벽 네시부터 tv를 켜셨다. CNN으로 시작하셔서 장중에는 한국경제TV를 보셨고 저녁에도 켜 놓으셨었다. 경제 신문 2개 일반신문 2개를 정독하셨던 분이다.

그래서 집에는 거의 항상 TV소리가 흘러나왔었다.

그 광경에 아버지가 보였었나 보다.

아침에 일어나 생각해 보니,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뭔 꿈에 나온거냐? 생각을 했다가도

너무 그 느낌이 선명했다. '아버지가 켜 놓으셨구나!' 하는 그 느낌.

나보다 나를 더 잘알았던 아버지.

가끔 그 생각을 한다.

아버지가 가라고 했던 "수학교육학과"나 "약학과". "수의학과" 이런 과를 찾아 갔다면 지금 다른 모습일까.

솔직히 아버지는 의대를 보내고 싶어했는데, 그정도의 성적은 안됐었으니,

아버지께서는 이런 과를 추천했었다.

고3 시절에 사춘기가 왔던 나는, 재수를 권유했던 아버지의 의견을 뒤로하고 무계열무전공을 할 수 있었던 학교에 입학했고, 건축 전공을 잠깐 하다가 컴퓨터 공학으로 갈아탔었다.

덕분에 취업은 금방(이라기 보다, 그때 학교로 왔던 리쿠르팅도 다 놓치고 공채로 붙었던 기억이..)되긴 했는데,

그 이후, 수많은 고민과 항로를 거쳐 결국 사람을 대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일로 왔다.

어찌 보면 아버지가 나를 훨씬 잘 알았던거다.

수교과, 약학과, 수의학과.. 이런곳이 전부 다 누군가를 도와주고 고쳐주는거다.

지금 내가 찾아가는 일도 그렇다.

결국 나도 지금 강사의 길로 들어섰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까..

뭐라고 해 주실까.

왠지 아버지께서

"잘했다. 지금 보니 니 얼굴에서 빛이 난다" 라는 말씀을 해 주실거 같은데...

아버지의 누구보다 훤칠하고 잘생긴 "웃음"이 그리워 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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